스포일러 주의
스크린샷은 물개님의 게임 블로그 
http://caswac.tistory.com/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글은 95년에 발매된 SFC 게임 천지창조(Terranigma)에 대한 리뷰입니다. 그렇다고 전문적인 리뷰는 아니고 그냥 제가 게임에서 느꼈던 것들을 정리하는 간단한 글입니다. ^^;

제게 천지창조는 FF6과 The Longest Journey와 함께 인생을 바꾼 게임 중 하나입니다. 이 게임은 창조신화를 바탕으로 한 방대한 스토리와 엄청난 자유도,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과 감동적인 장면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특히 신화를 어떻게 게임의 스토리로 재구성했는지, 이 게임에 얼마나 많은 신화적 상징이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묶여 또 다른 신화를 만들어냈는지 제 부족한 지식과 좁은 견문으로이 게임의 스토리에 대해 이야를 논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이 리뷰에서는 이 게임의 이야기가 제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그래서 어떤 감명을 받았는지를 적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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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훌륭한 이야기들 처럼, 이 게임도 영웅의 여정과 귀환이란 구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인물들은 여정을 통해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을 깨닫고 획득하며, 주인공은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면서 세상의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이 게임을 특별하게 만들어요.

그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이 게임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것들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그것을 그리는 방식입니다.

영문판의 번역은 "The planet possessed two souls, An external face and an internal face."

이 게임의 이야기는 별(지구)이 가진 이중성(빛/어둠)을 강조하면서 시작합니다. 천지창조의 서사에서 이중성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고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 사건, 테마에 걸쳐 강조되고 있습니다.

관문 1,23의 중간까지의 이야기는 금기를 범한 주인공이 일상에서 벗어나 시련을 거쳐 세계를 회복시키는 모험서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때는 주인공 아크의 모험을 통해 세계에 질서는 확장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곧 서사가 반전됩니다. 사실 아크의 모험은 세계를 부활시키는 천지창조의 모험이면서, 동시에 세계에 궁극적인 멸망을 가져오는 모험이었습니다. 모든 진실은 거짓이었고, 주인공 본인마저 어둠 속에서 만들어진 가짜였습니다. 주인공이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도 주인공을 속이고 있었지요.

그래도 이렇게 잔인한 배신을 겪고도 다시 일어났기 때문에, 어둠의 존재였던 주인공이 빛의 자신을 찾아 빛과 어둠을 모두 지닌 형태로 각성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의 모험이 처음부터 질서와 무질서를 동시에 갖는 이중적인 형태였기 때문에 오히려 진정한 길을 찾을 수 있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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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중간에 반전되는 게임 서사는 게임의 공간구성에서 암시되고 있었습니다. 이 게임의 세계는 지저세계와 지상세계로 나뉘는데, 주인공은 사명을 위해 모험을 떠나면서 지저세계에서 지상세계로 올라가죠.

지저에서 지상으로 다이빙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은 지저세계에서 지상세계로 올라가기 위해 거대한 구멍으로 떨어져요. 신화에서 영웅은 세상에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 세상의 중심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주인공은 왜 떨어질까요? 저는 이게 항상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게임을 몇 번씩 해보면서 이 장면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저는 이것이 전부 세계의 본모습이 밝혀지면서 설명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리적 이동과 서사적 이동

사실 지저세계는 지상세계를 모방한 가짜였고, 모든 것의 흑막이었던 어둠의 신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빛의 신은 봉인되어 있었으니 지저세계야 말로 신들이 사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즉, 지저세계는 지상세계보다 저차원에 있으면서 사실 더 고차원적인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중심이 어디인지 역시 상대적인 것이 됩니다. 영웅의 모험은 세계의 끝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사실 그림자였던 주인공은 모험을 떠나기 위해 지상세계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신들이 존재하는 상위 세계에서 멀어져 인간의 세계로 적강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세계의 중심에서 오히려 더 멀어졌습니다. 대신 진정한 출발점인 세계의 끝에 서게 되었죠.

그리고 지상을 구원한 후에 주인공은 어둠의 신과 대면하기 위해 지저세계로 귀환하게 됩니다. 이것은 영웅이 된 그에게 '귀향'인 동시에 진정한 '세계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궁극적인 여정이 됩니다.

서사학에서 설명하는 영웅의 여정

이 게임에서 주인공은 불완전한 이중성이 강조되는 존재입니다. 주인공의 여정은 영웅의 순환을 따르고 있어요. 고아가 금기를 어겨 소명을 부여받고 일상에서 벗어나, 시련을 극복하고 영웅적인 과업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빛의 영웅이 복제품, 그림자입니다. 어둠에 귀속된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어둠의 신을 무찌를 수 없습니다. 영웅적인 요소를 갖고 태어나긴 했지만, 그것은 그가 영웅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었던 가짜였음이 드러나고 결국 주인공은 태생적 한계 때문에 영웅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그림자였던 주인공이 빛의 자신을 찾아 하나가 됐기 때문에 자신의 불완전한 이중성을 극복할 수 있었고, 영웅으로 다시 이야기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서야 그는 세상의 어둠과 맞설 수 있는 존재가 되었죠.

다른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사실 이중적인 존재들이에요. 주인공의 완벽하고 헌신적인 조력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자 아무렇지도 않게 주인공을 죽이려고 합니다. 혹은 단순해보였던 인물이 뜻밖의 조력을 하곤 합니다. 이런 모습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히로인인 두 명의 엘입니다. 두 명의 '엘'은 서사를 거듭할수록 불완전한 형태를 띱니다.

주인공의 마음 속에는 두 명의 엘이 자리잡고 있다

지저세계의 엘

지저세계의 엘은 완벽한 히로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주인공의 소꿉친구고 주인공의 과업을 돕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제세계의 엘은 주인공이 과업을 완수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그랫듯이 지저세계의 엘도 지상세계의 엘의 모방… 그림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녀는 주인공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고 결국 그를 대신하여 죽습니다.

지상세계의 엘

반면에, 지상세계의 엘은 비틀린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복수를 위해 양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의 마음속에 점점 그녀가 자리 잡게 됩니다. 그녀는 주인공에게 또 세계의 운명에 중요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지상세계의 엘은 주인공에게 '너는 지저세계의 엘을 대신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듣게 됩니다.

죽음의 순간에 주인공은 지저세계 엘의 영혼과 약속을, 지상세계의 엘을 찾아가는 꿈을

결국 주인공은 둘 중 누구와도 맺어지지 못하고 불완전한 형태로 귀환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주인공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지창조에서 설명하는 이중성은 서과 악, 신과 악마처럼 이분법적인 것이 아닙니다. 별은 두 개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서사는 이 둘을 경쟁해야하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와 죽음처럼 순환하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이야기의 갈등은 불완전한 이중성의 대립을 해체하는 방법의 차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둠의 신은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과 같은 대립관계를 무너뜨려 무로 만들어 이를 해소하려고 하였고 이것은 세계의 무질서로 이어졌습니다. 반면에 주인공은 자신의 대립쌍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이중성을 해소하였죠. 서로 다른 속성의 존재를 받아들여 질서 안에서 대립을 해결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끝난 다음에도 주인공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이중적인 존재로 남습니다. 그는 세계를 다시 창조하고 신을 쓰러뜨린 인신이 되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모두 잃고 죽음을 앞둔 인간이 됩니다. 주인공이 세계의 질서를 부수지 않고 이중성이 존재하는 세계의 질서를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도 자신이 지켜낸 세계의 질서에 따라 죽음을 통해 커다란 순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게임을 처음 접했을 적의 저는 드라마에서 본 어느 대사를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중성은 인간의 본능이다"라는 대사였어요. 세상의 모든 것은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고 언제나 내가 보지 못하는 이면이 존재합니다. 당연한 세상의 이치인데 아직도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힘드네요.

그래서 이 게임이 그렇게 제 마음 속에서 빛나는 것 같아요. 이중적이고 불합리해보이기도 하는 세계에도 질서는 존재하고, 가장 좌절했을 때가 오히려 빛이 보이는 순간이 되고, 끝이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이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는 걸 저한테 가르쳐줬거든요. 게임에서 어떤 메시지를 느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제가 만드는 이야기는 이 게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모방에 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따라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어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네요.

형편없는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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